2023. 8. 27. 00:35ㆍ시사 트래커
253년 (분기에는 249년) 외국의 사신 갈나고가 객관에 와 있었다. 석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그가 왜국 사신에게 농담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굽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했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 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 긴 것이니 내가 감당하겠다고 하고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지난번의 말은 농담일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 할 줄 생각했겠 는가. 왜인은 대답하지 않고 석우로를 잡아서 장작더미 위에 얹고 불태워 죽였다.
미추왕 때에 왜국의 대신이 와서 문안했다.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해서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가 몹시 취하 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왜국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45, 열전5 석우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석우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토를 달았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역사의 교훈일까?
이 설화에는 두 가지 사실이 숨어 있다.
석우로가 일본왕을 노예로 삼겠다고 말할 정도의 국가 간의 첨예한 갈등, 그리고 신라왕이 피난을 할 정도의 심각한 패배다.
287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질러 태우고 1천 명을 붙잡아 갔다.
289년 5월 왜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했다.
292년 왜의 군사가 사도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295년 유례왕은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니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가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신라는 일본에 대해 더욱 저자세가 되어 갔다.
310년 석우로의 아들인 홀해가 왕이 되었다.
부친의 한을 안고 있는 그가 왕이 되니 이제 신라가 왜국에 대해 강경책으로 돌아설 것 같지만, 공과 사는 달랐다.
홀해왕은 복수를 주창하기는커녕 화해의 선봉이 되었다.
일본과 사신을 교환하고, 공주급 여인(재상이던 아찬 급리의 딸)을 왜의 왕자와 결혼시켰다.
물론 이것은 홀해왕의 발상이 아니고 왜왕의 요구에 따른 결혼이었다.
344 년 또 여인을 요구하자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혼담을 거절했다.
왜는 국교를 끊고 신라를 공격했다.
서라벌이 약탈당했지만 흘해왕은 그저 월성 안에 웅크 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라도 고민스러웠다.
신라도 나름 많이 성장했다. 165년 이후 백제와 혈전 을 치르면서 소국연맹체제의 한계를 깨닫고 주변의 소국을 병합해서 직할령 을 넓혔다.
그러나 서라벌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왜군에게 포위되고 약탈 당하였다.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신라는 그것을 깨달을 틈도, 실천할 여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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